메리 셸리 그리고 『프랑켄슈타인』
이 언니를 만나다/시즌 2 다시, 여성읽기
2012/03/16 09:00
소설 속에 숨어 있던 그녀, 메리 셸리를 만나다!
대학 시절, 주위엔 제 전공인 법학과 친구들보다 영문과나 불문과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원치 않게 그녀들이 듣는 수업을 청강할 기회도 많았습니다. 관심사가 문학이었다기보다 친구들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느니, 함께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 때문이긴 했지만요. 아직도 기억나는 건 절친이 듣던 ‘19세기 여성 문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다루는 날, 친구는 물론 영어로 쓰인 책, 저는 당연히 한글 번역본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사실 저는 『프랑켄슈타인』이 여성 작가가 쓴 책이라는 걸, 그날에야 알았습니다(제가 쫌 무식). 이제까지 메리 셸리는 남성 작가가 사용한 여성 필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게다가 메리 셸리는 제가 여성학 수업 시간에 열심히 스펠까지 외우며 알고 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둘째 딸이기도 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놀라운 소식인가~ 하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쓴 소설이 이디스 워튼이나 캐서린 맨스필드가 쓴, 소위 말하는 여성적 섬세함에 기반한 소설이 아니라 고딕 소설, 공상과학류의 공포 소설이라는 걸 알았을 땐 도대체 왜 이 언니가 이런 소설을 쓴 것일까 하는 궁금증마저 들었습니다.

1797년 3월 29일에 태어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언니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여의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재한 엄마를 대신해 아빠와 의붓어머니가 그녀를 키웠다고 하네요. 메리 셸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골드윈은 멋진 엄마와 결혼할 만큼 의식이 깨어 있는 분이긴 하셨으나, 자기 자식 문제만큼은 또 가부장적이셔서, 딸 메리를 잘 키워 주긴 하셨으나 이후에 낳은 아들만큼 그리 아끼진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홀대? 냉대? 덕분에 메리는 아버지의 친구가 살고 계신 스코틀랜드에서 자라게 되었고, 또 거기서 훌륭한 교육을 받아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똑똑한 아가씨로 성장하여 런던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엄마의 열정적인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메리 역시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에너지만큼은 어머니에 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시인 퍼시 셸리에게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그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네요. 여기까진 메리에게 큰 변화의 순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 16살에 셸리와 사랑에 빠진 후, 퍼시 셸리가 사망할 때까지 많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죽어 가는 걸 지켜보면서, 그녀에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또한 퍼시 셸리의 원래 부인이었던 해리엇 셸리에 대한 죄책감(헤리엇은 남편이 2년간 돌아오지 않자 자살합니다). 태어나는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괴로움 등이 메리에겐 점점 더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죽음과 상처만이 메리 셸리에게 중요한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유부남과의 도피 행각으로 아버지와 의절한 상태이긴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당대 영국에선 유명한 문학가였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인 퍼시 셸리는 부모님에게 어울리는 딸임을 증명해야 한다며, 그녀에게 글을 쓰라고 종용하곤 했었다고 하네요. 사실 남편의 부추김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소외, 태어날 때부터 본 적은 없지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어머니의 명성. 메리는 그때부터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낭만파 시인으로 유명한 퍼시 셸리가 바이런 같은 다른 남성 문학가들과 사귀면서 메리에 대한 애정도 소홀해져 생활비를 마련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글쓰기라도 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원치 않는 글들을 써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리는 남편과 남편의 친구인 바이런과 모여 자신이 꾼 무서운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공포소설 창작 컨테스트를 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고전 반열에 오르며 별로 무섭지도 않은 이 이야기는 당대만 해도 엄청나게 무서운 이야기였고, 다양한 함축들을 담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죠. 영미 문학계의 비평가들은 많은 여성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녀들의 문학에 담긴 의미를 분석해 내긴 했으나 메리 셸리만큼은 제대로 보질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야기의 강렬함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공포 소설들은 여자가 쓸 수 없다는 편견? 오히려 많은 비평가들은 그녀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복잡한 은유와 기묘한 배치들을 이루고 있어, 독자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저자 자신을 익명성의 위치에 놓는 기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메리 셸리와 『프랑켄슈타인』 속에서 그녀가 말하려고 했던 것들을 살짝만 열어 보려고 합니다.
흔히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괴물의 이름은 정말 괴물, 익명의 존재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파국을 초래하는 진짜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이지요. 이 소설에는 프랑켄슈타인과 괴물만 있는 건 아닙니다. 북극 탐험 중인 선장 로버트 월튼도 있지요. 그래서 이야기는 세 가지 내용으로 나뉩니다.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하는 이야기,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이야기, 북극 탐험가 로버트 월튼이 여동생 마거릿 새빌에게 보내는 편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남성(!)입니다. 그렇다고 여성들은 모두 부차적 인물이냐~ 그건 절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남성 인물들은 하나같이 뭔가에 집중하고, 몰두하고,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들에 천착합니다. 그러나 그 집중과 몰두에서 생산되는 것들은 어떤 소통이나 조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보다 자신의 피조물적 한계를 뛰어넘어 창조자가 되기 위함이었고, 그 창조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고 싶지 않다는 자기고립적인 방식인 것이죠. 결국 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람이 걱정하지만, 본인들만 모르고 스스로 벽을 세우듯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것만은 아닙니다. 좀더 들여다보자면, 주인공의 빅터(Victor)라는 이름도 의미심장합니다. 오직 승리만을 생각하는 주인공의 오만함이 이름에 그대로 깃들어 있죠.
메리 셸리의 소설은 인물들의 이름만 분석하는 것으로 논문 한 편이 나올 만큼 세밀하고, 꼼꼼한 은유가 숨겨져 있습니다. 주인공인 빅터뿐만 아니라, 탐험대장 월튼은 'Walled town'이라는 의미에서 볼 수 있듯, 벽으로 휩싸인 도시를 가리킵니다. 대신 그녀의 동생인 마거릿 새빌(Magaret Saville)은 월튼에 대비되는 진주와 같은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고향을 의미하고, 빅터의 약혼자인 엘리자베스 라벤자(Lavenza)는 빅터의 폐쇄성과 폭력적인 창조 성향에 대한 ‘복수’라는 의미를 지닌 ‘revenge'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름에 담긴 이 은유들 덕분에 당대 저널들이 이 소설을 메리 셸리가 쓴 게 아니라, 낭만파 시인인 퍼시 셸리가 쓴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할 만큼 반종교적이고, 반문명적인 의도가 이름 곳곳에 담겨 있어서 비판도 많이 받았다고 하지요.
이런 이름에 숨겨둔 은유들 역시도 후대의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메리 셸리가 자신이 소설의 저자로 전면에 드러나는 걸 숨기기 위한 장치라고 봅니다. 루소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당시엔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만큼 여성의 참정권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사회에서 배척받았던 엄마의 적극적인 사상이 어떤 식으로 영국 사회에서 짓밟혔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모든 생각은 소설 속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그녀가 사용한 이 이름들은 반종교적이고 반문명적일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 책 안에서 기계와 계몽으로 대표되는 남성적 문화와 자연과 생명력으로 대비되는 여성적 문화를 대비시킴으로써 이 둘 사이가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 때 어떤 결말을 빚게 되었는지 드러냅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메리 셸리는 앞서 말씀드렸듯 퍼시 셸리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남자아이 단 한 명만 살아남고, 모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합니다. 임신과 출산을 통해 메리 셸리는 인간을 창조하는 일이 결코 한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남편을 비롯한 주변의 남성들을 보면서 남성들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것들이 죽음으로 다가올 때 그저 놓아두거나, 혹은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아예 맘에 들지 않는다고 버렸을 때 그것은 곧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이 비극은 빅터가 만든 괴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괴물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 비록 생김은 괴물 같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기괴한 외모로 사람들에게 쫓겨다니다가 그를 만든 빅터에게 다시 찾아갑니다.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창조물을 하나 더 만들어 달라구요. 아버지(빅터)에 의해서만 태어난 괴물은 간절하게 자신의 짝을 원하지만 아버지 빅터는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나름 명문가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빅터는 오히려 괴물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훨씬 더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괴물에게 넌 나의 종이니 자신에게 복종하라고만 외칩니다. 인간이 괴물로 변하고, 괴물은 누구보다 인간다워지는 순간입니다. 당대 빅토리아 왕조 시기,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기술 문명이 어디가 끝인 줄 모르고 발전해 가던 시절, 기계와 기술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남성 과학자들과 사업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남성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고, 상상만으로 선혈이 흩뿌려져 있을 것만 같은 복수와 도피가 대부분인 이 소설에서 여성성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메리 셸리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그녀는 특이하게도 여성성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빅터, 괴물, 로버트 월튼 모두 남성성만을 중시했다가 망하긴 했지만, 그 반대항에 대한 치유로 여성성을 제시하진 않습니다. 분명 소설 안에선 로버트 월튼의 여동생이나 빅터의 약혼자인 엘리자베스가 그들의 폭력적인 성향의 대척점에 있긴 하나, 그것 자체로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증오와 폐쇄의 벽을 넘으려면 양성이 함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요.
이 주장은 메리 셸리의 엄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보다 한참 후퇴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고 싶진 않습니다. 여성의 예속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를 비판하고, 여성을 한갓 애교덩어리 짐승쯤으로 취급하는 장 자크 루소나 에드먼드 버크의 의견에 반대하여 여성은 남성에게 아양이나 떨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격렬하게 항의하던 엄마와 비교해 본다면 조금 미진한 느낌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보면서, 그리고 그런 문명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자식들의 죽음)을 보면서, 아마 ‘이성’만을 중시하던 엄마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성’만을 중시하던 남성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남성과 여성의 감수성이 함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했기에 어머니의 사유를 이어받아 ‘이성적 여성’과 ‘감성적 여성’이 함께 손잡고 성장했던 소설 『마리아 또는 여성의 과오』라는 책을 쓸 수 있었을 듯합니다.
메리 셸리는 어쩌면 엄마의 후광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지금까지도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녀의 딸인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라는 것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또 비평가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한 탓에 소설은 유명하지만 작가는 거의 무명인 상태로 머물러 왔죠.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여성의 사회적 예속과 참정권을 주장했다면, 그녀는 『프랑켄슈타인』이나 그 외의 소설들을 통해 기술 문명의 발전과 계몽의 폐해를 날카롭게 파헤쳤습니다. 또한 엄마와 마찬가지로 여성성을 나약한 것들로 정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적인 것, 포용의 에너지로 정의함으로써 양성성의 조화라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미 메리 셸리는 오래전부터 예리한 시선으로 남편과 그의 친구들을 보며 남성적 사교 문화가 갖는 폐쇄성을 그녀의 사생활 속에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고, 기술 문명에 열광하고 교육으로 계몽된 남성들이 어떤 횡포를 저질러 왔는지 아웃사이더의 위치에서 바라보았으며,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가 인간의 손에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생애 내내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그녀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한 자세로 글쓰기를 계속해 왔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섬세함 덕분에 그녀는 양성성의 조화, 남성성이나 여성성만을 강조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들, 어쩌면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을 200년 전에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메리 셸리의 삶과 『프랑켄슈타인』을 연결해 봤을 때, 『프랑켄슈타인』이 단순한 공포 소설이 아니라, 현실 사회적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글부터는 (사실 벌써부터 걱정되긴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언니들을 한 번씩 만나보려고 합니다. 다음에도 저기 먼 곳에서 우리와 기다리길 만나는 언니들을 꼭 함께 만나서 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나눠 보고 싶습니당~.
대학 시절, 주위엔 제 전공인 법학과 친구들보다 영문과나 불문과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원치 않게 그녀들이 듣는 수업을 청강할 기회도 많았습니다. 관심사가 문학이었다기보다 친구들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느니, 함께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 때문이긴 했지만요. 아직도 기억나는 건 절친이 듣던 ‘19세기 여성 문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다루는 날, 친구는 물론 영어로 쓰인 책, 저는 당연히 한글 번역본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사실 저는 『프랑켄슈타인』이 여성 작가가 쓴 책이라는 걸, 그날에야 알았습니다(제가 쫌 무식). 이제까지 메리 셸리는 남성 작가가 사용한 여성 필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게다가 메리 셸리는 제가 여성학 수업 시간에 열심히 스펠까지 외우며 알고 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둘째 딸이기도 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놀라운 소식인가~ 하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쓴 소설이 이디스 워튼이나 캐서린 맨스필드가 쓴, 소위 말하는 여성적 섬세함에 기반한 소설이 아니라 고딕 소설, 공상과학류의 공포 소설이라는 걸 알았을 땐 도대체 왜 이 언니가 이런 소설을 쓴 것일까 하는 궁금증마저 들었습니다.

리처드 로스웰이 1840년에 그린 메리 셸리의 초상화
1797년 3월 29일에 태어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언니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여의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재한 엄마를 대신해 아빠와 의붓어머니가 그녀를 키웠다고 하네요. 메리 셸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골드윈은 멋진 엄마와 결혼할 만큼 의식이 깨어 있는 분이긴 하셨으나, 자기 자식 문제만큼은 또 가부장적이셔서, 딸 메리를 잘 키워 주긴 하셨으나 이후에 낳은 아들만큼 그리 아끼진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홀대? 냉대? 덕분에 메리는 아버지의 친구가 살고 계신 스코틀랜드에서 자라게 되었고, 또 거기서 훌륭한 교육을 받아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똑똑한 아가씨로 성장하여 런던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엄마의 열정적인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메리 역시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에너지만큼은 어머니에 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시인 퍼시 셸리에게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그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네요. 여기까진 메리에게 큰 변화의 순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 16살에 셸리와 사랑에 빠진 후, 퍼시 셸리가 사망할 때까지 많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죽어 가는 걸 지켜보면서, 그녀에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또한 퍼시 셸리의 원래 부인이었던 해리엇 셸리에 대한 죄책감(헤리엇은 남편이 2년간 돌아오지 않자 자살합니다). 태어나는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괴로움 등이 메리에겐 점점 더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죽음과 상처만이 메리 셸리에게 중요한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유부남과의 도피 행각으로 아버지와 의절한 상태이긴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당대 영국에선 유명한 문학가였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인 퍼시 셸리는 부모님에게 어울리는 딸임을 증명해야 한다며, 그녀에게 글을 쓰라고 종용하곤 했었다고 하네요. 사실 남편의 부추김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소외, 태어날 때부터 본 적은 없지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어머니의 명성. 메리는 그때부터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낭만파 시인으로 유명한 퍼시 셸리가 바이런 같은 다른 남성 문학가들과 사귀면서 메리에 대한 애정도 소홀해져 생활비를 마련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글쓰기라도 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원치 않는 글들을 써야 했다고 합니다.

흔히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괴물의 이름은 정말 괴물, 익명의 존재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파국을 초래하는 진짜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이지요. 이 소설에는 프랑켄슈타인과 괴물만 있는 건 아닙니다. 북극 탐험 중인 선장 로버트 월튼도 있지요. 그래서 이야기는 세 가지 내용으로 나뉩니다.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하는 이야기,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이야기, 북극 탐험가 로버트 월튼이 여동생 마거릿 새빌에게 보내는 편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남성(!)입니다. 그렇다고 여성들은 모두 부차적 인물이냐~ 그건 절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남성 인물들은 하나같이 뭔가에 집중하고, 몰두하고,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들에 천착합니다. 그러나 그 집중과 몰두에서 생산되는 것들은 어떤 소통이나 조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보다 자신의 피조물적 한계를 뛰어넘어 창조자가 되기 위함이었고, 그 창조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고 싶지 않다는 자기고립적인 방식인 것이죠. 결국 이들은 주위의 모든 사람이 걱정하지만, 본인들만 모르고 스스로 벽을 세우듯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것만은 아닙니다. 좀더 들여다보자면, 주인공의 빅터(Victor)라는 이름도 의미심장합니다. 오직 승리만을 생각하는 주인공의 오만함이 이름에 그대로 깃들어 있죠.
메리 셸리의 소설은 인물들의 이름만 분석하는 것으로 논문 한 편이 나올 만큼 세밀하고, 꼼꼼한 은유가 숨겨져 있습니다. 주인공인 빅터뿐만 아니라, 탐험대장 월튼은 'Walled town'이라는 의미에서 볼 수 있듯, 벽으로 휩싸인 도시를 가리킵니다. 대신 그녀의 동생인 마거릿 새빌(Magaret Saville)은 월튼에 대비되는 진주와 같은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고향을 의미하고, 빅터의 약혼자인 엘리자베스 라벤자(Lavenza)는 빅터의 폐쇄성과 폭력적인 창조 성향에 대한 ‘복수’라는 의미를 지닌 ‘revenge'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름에 담긴 이 은유들 덕분에 당대 저널들이 이 소설을 메리 셸리가 쓴 게 아니라, 낭만파 시인인 퍼시 셸리가 쓴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할 만큼 반종교적이고, 반문명적인 의도가 이름 곳곳에 담겨 있어서 비판도 많이 받았다고 하지요.
이런 이름에 숨겨둔 은유들 역시도 후대의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메리 셸리가 자신이 소설의 저자로 전면에 드러나는 걸 숨기기 위한 장치라고 봅니다. 루소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당시엔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만큼 여성의 참정권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사회에서 배척받았던 엄마의 적극적인 사상이 어떤 식으로 영국 사회에서 짓밟혔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모든 생각은 소설 속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그녀가 사용한 이 이름들은 반종교적이고 반문명적일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 책 안에서 기계와 계몽으로 대표되는 남성적 문화와 자연과 생명력으로 대비되는 여성적 문화를 대비시킴으로써 이 둘 사이가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 때 어떤 결말을 빚게 되었는지 드러냅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메리 셸리는 앞서 말씀드렸듯 퍼시 셸리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남자아이 단 한 명만 살아남고, 모두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합니다. 임신과 출산을 통해 메리 셸리는 인간을 창조하는 일이 결코 한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남편을 비롯한 주변의 남성들을 보면서 남성들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것들이 죽음으로 다가올 때 그저 놓아두거나, 혹은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아예 맘에 들지 않는다고 버렸을 때 그것은 곧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스틸컷
이 비극은 빅터가 만든 괴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괴물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 비록 생김은 괴물 같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기괴한 외모로 사람들에게 쫓겨다니다가 그를 만든 빅터에게 다시 찾아갑니다.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창조물을 하나 더 만들어 달라구요. 아버지(빅터)에 의해서만 태어난 괴물은 간절하게 자신의 짝을 원하지만 아버지 빅터는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나름 명문가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빅터는 오히려 괴물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훨씬 더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괴물에게 넌 나의 종이니 자신에게 복종하라고만 외칩니다. 인간이 괴물로 변하고, 괴물은 누구보다 인간다워지는 순간입니다. 당대 빅토리아 왕조 시기,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기술 문명이 어디가 끝인 줄 모르고 발전해 가던 시절, 기계와 기술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남성 과학자들과 사업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남성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고, 상상만으로 선혈이 흩뿌려져 있을 것만 같은 복수와 도피가 대부분인 이 소설에서 여성성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메리 셸리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그녀는 특이하게도 여성성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빅터, 괴물, 로버트 월튼 모두 남성성만을 중시했다가 망하긴 했지만, 그 반대항에 대한 치유로 여성성을 제시하진 않습니다. 분명 소설 안에선 로버트 월튼의 여동생이나 빅터의 약혼자인 엘리자베스가 그들의 폭력적인 성향의 대척점에 있긴 하나, 그것 자체로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증오와 폐쇄의 벽을 넘으려면 양성이 함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요.
이 주장은 메리 셸리의 엄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보다 한참 후퇴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고 싶진 않습니다. 여성의 예속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를 비판하고, 여성을 한갓 애교덩어리 짐승쯤으로 취급하는 장 자크 루소나 에드먼드 버크의 의견에 반대하여 여성은 남성에게 아양이나 떨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격렬하게 항의하던 엄마와 비교해 본다면 조금 미진한 느낌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보면서, 그리고 그런 문명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자식들의 죽음)을 보면서, 아마 ‘이성’만을 중시하던 엄마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성’만을 중시하던 남성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남성과 여성의 감수성이 함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했기에 어머니의 사유를 이어받아 ‘이성적 여성’과 ‘감성적 여성’이 함께 손잡고 성장했던 소설 『마리아 또는 여성의 과오』라는 책을 쓸 수 있었을 듯합니다.
메리 셸리는 어쩌면 엄마의 후광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지금까지도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녀의 딸인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라는 것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또 비평가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한 탓에 소설은 유명하지만 작가는 거의 무명인 상태로 머물러 왔죠.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여성의 사회적 예속과 참정권을 주장했다면, 그녀는 『프랑켄슈타인』이나 그 외의 소설들을 통해 기술 문명의 발전과 계몽의 폐해를 날카롭게 파헤쳤습니다. 또한 엄마와 마찬가지로 여성성을 나약한 것들로 정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적인 것, 포용의 에너지로 정의함으로써 양성성의 조화라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점에서 비이성적인가.─우리는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판단들과 더 이상 믿지 않는 교설들에서 여전히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리의 감정을 통해서 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책세상, 109쪽
이미 메리 셸리는 오래전부터 예리한 시선으로 남편과 그의 친구들을 보며 남성적 사교 문화가 갖는 폐쇄성을 그녀의 사생활 속에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고, 기술 문명에 열광하고 교육으로 계몽된 남성들이 어떤 횡포를 저질러 왔는지 아웃사이더의 위치에서 바라보았으며,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가 인간의 손에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생애 내내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그녀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한 자세로 글쓰기를 계속해 왔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섬세함 덕분에 그녀는 양성성의 조화, 남성성이나 여성성만을 강조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들, 어쩌면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을 200년 전에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메리 셸리의 삶과 『프랑켄슈타인』을 연결해 봤을 때, 『프랑켄슈타인』이 단순한 공포 소설이 아니라, 현실 사회적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글부터는 (사실 벌써부터 걱정되긴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언니들을 한 번씩 만나보려고 합니다. 다음에도 저기 먼 곳에서 우리와 기다리길 만나는 언니들을 꼭 함께 만나서 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나눠 보고 싶습니당~.
- 편집부 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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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Cash Advance Online Kin 2013/05/01 18:02 삭제31:6 i have hated them that regard lying vanities: but i trust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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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글을 친절하고도 차분하게 아주+아주 잘 쓰시는군요! 글 읽기 자체가 즐거움이네요. 고맙습니다.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많이많이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