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고도 급진적인 99%의 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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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맞은편 광장에 모인 사람들. 먹을 것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사진을 찍는 일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공간이었다.

은행 노동자들이 쉬느라고 문을 닫은 은행들로 둘러싸인 분수광장에서, 우리는 모였다. 이른바 한국은행 앞 분수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해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근처에 있는 백화점과 분수대의 화려한 야경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이름난 곳이라고 한다. 햇빛이 쨍하던 오월의 첫날, 그곳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이유로 모였다.

함께한 그린비 사람들은 99%라는 연두색 글자가 귀엽게 프린트 된 하얀 티셔츠를 입고 갔는데, 그곳엔 이미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펴고 있었다. 노래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언가를 쓰는 사람도 있었고, 사진을 찍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자는 사람, 먹는 사람, 그냥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얼핏 보면 여느 주말 공원이나 놀이터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더 왁자지껄하고, 알록달록하고, 사람들이 음악이나 커피나 떡이나 사탕이나 이야기 같은 무언가를 나누려고 한다는 것 정도랄까.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건, 돈 내고 이걸 사야만 당신의 인생이 스페셜해진다고 주문을 외는 광고나 기업의 로고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긴 피켓, 플랑, 편지, 스티커들이었다.   

그래, 이날은 ‘일하고 움직이는’ 노동자의 날, 언제부턴가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의 날이라고도 불리는 메이데이였다. 직접 참여한 건 올해가 처음이지만 아마도 해마다 이날이면 서울 중심가에서는 빨간 띠와 빨간 조끼, 빨간 깃발의 행진, 그리고 집회가 이어져 왔을 것이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고 노동자의 단결과 기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분명히 이런 붉은 투쟁으로 쌓여 온 것일 테다. 그리고 나는 그 역사의 무게를 생각하면 숙연해짐과 동시에 어떤 책임감이 묵직하게 누르는 것을 느낀다. 역사라는 건 너무나 거대해서 나는 그 앞에서 너무나 작아지기 마련이고, 특히 수많은 희생을 치른 역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비장미와 엄숙미, 숭고미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테니 너무 쭈그러들지는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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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에 우리가 할 것! 점거, 그리고 즐기기! >_<

메이데이 현장을 전하는 기사들은 으레 ‘어떤 단체 소속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행진을 했다고 썼지만, 사실 이날 ‘총파업’을 하고 광장과 거리를 ‘점거’한 사람들을 그렇게 집합적 조직으로만 보는 건 너무 해묵은 생각이다. 이날 분수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얘기를 제대로 들었다면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파업은 노조에 가입된 사람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알바생은 알바파업, 엄마아빠는 육아파업, 학생들은 공부(노동)파업, 심지어 자녀들은 효도파업까지. 이날 총파업에서 어떤 이들은 꾸미기노동파업을 선언하며 No 하이힐, No 메이크업, No 브라를 말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우리가 익숙한 삶의 모든 분야에 중단을 선언하고 파업할 수 있어야, 메이데이가 매년 똑같은 행사를 치르는 기념일쯤으로 축소되지 않고 우리의 일과 삶에 대해 뿌리부터 깊숙하게 고민하는 의미 있는 날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꼭 돈을 대가로 받아야만 일이라는 통념을 벗어나면, 우리가 하는 활동은 무엇이든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에 보면 월스트리트 점거 중에 열린 토론회에서 어떤 사람이 점거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지금 점거는 적극적인 요구를 내놓지 않음으로 해서 차이들을 은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요구들을 하게 되면 차이들이 표면으로 드러날 텐데 아직 그것이 은폐되어 있어요. 어설픈 화해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차이는 차이대로 명확히 부각시키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저는 어설프게 덮는 걸 반대합니다.” 점거자들이 그저 ‘우리 모두 99%’라는 느슨한 울타리 안에 어설프게 묶여 있는 그 상태로는 하나의 ‘운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성이란 과연 어떤 결집된 사람들의 단결된 힘으로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일까?        

유쾌했던 분수광장에서의 점거와 행진을 마치고 나서는 서울광장으로 이동해서 거대한 붉은 집회에 연대하러 참여했다. 그런데 좀 전과 사뭇 다른 엄숙한 분위기에 괜히 머쓱함을 떨치려고 잔디밭 변두리에서 분수광장에서 하던 대로 오카리나를 불어 보았는데, 이런, 돌아오는 건 빨간 조끼 아저씨의 ‘집회 좀 합시다’라는 딱딱한 눈총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투쟁을 외치시는 아저씨의 고단하셨을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분들이 일구어 오셨을 운동의 역사를 생각하면, 내가 참 분위기 파악을 못했구나 싶어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바로 그 순간 나는 그 거대한 집회로부터 소외되고 만 것이 아닐까. 밝고 가벼운 악기 소리를 받아들이기에는 그 ‘집회’가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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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리나로 '점거'를 한다, 는 것이 목표였던 글쓴이의 '점거'는 정말 멋졌다. ^^

99%와 1%. 사실 나는 1%의 삶이 어떤 건지 잘 모른다. 그래서 그냥 나는 99%인가보다 하는 것일 따름인데. 그날 우리가 입고 있던 하얀 티셔츠는 99%라는 문구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1%에 맞서 싸우는 의미로서의 99%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만약에 그렇다면, 운동은 순식간에 1%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99%의 ‘어설픈 화해’로 전락하고 말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집회나 파업에 대해 종종 혀를 차는 사람들의 논리가 그것이 아닌가. 결국 밥그릇 다툼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99%라고 하는 건, 그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건 너무 거대해서 입에 담기도 어렵지만, 99%의 삶이라는 정체성은 나도 99%고 너도 99%니까 우리 함께 서로의 삶을 얘기하고 나눠 보자고 사뿐하게 손 내밀 수 있으니까 말이다. 구체적인 요구 사항들로 단결된 탄탄한 집회에 비해 99%라는 정체성으로 두루뭉술하게 모인 사람들의 최근 점거 운동은 어설프고 아마추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공간 그 시간 안에 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당장은 알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때 그 터무니없던 외침들이, 몸짓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었는지 알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계속 움직일 힘을 얻을 따름이다.  

이번 메이데이를 겪으며 ‘총파업’이라는 단어가 무척 좋아졌다. 내가 어떤 체제 안에 살고 있는지, 내가 어떤 체제로 이동해 나아가고 싶은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총파업이 메이데이 하루의 이벤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단호하게 중단할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정리되지 않는 질문들로 삐뚤빼뚤한 이 글처럼 어설프더라도 어디로 튈지 모르게 급진적으로 나의 삶을 점거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모든 파업들이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즐거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 편집부 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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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거리에서 점거가 계속되길!!!!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2012/05/03 09:00 2012/05/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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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위묘 2012/05/07 01:15

    그린비 식구들의 총파업 참관기를 죽 읽었습니다. 저는 그날 명동예술극장에서부터 동참했는데, 한국은행 앞 점거에 함께 하지 못한 게 아쉽네요. 중간에 잠시 빠지는 바람에 삼성 앞에서 벌인 춤판(!)도 함께 하지 못하고ㅜ 그린비 식구들 모두 즐거운 피로감을 느끼실 거라 생각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 그린비 2012/05/07 09:27

      와웅! 홍위묘님도 함께하셨군요~
      저는 명동행진 이후에 시청 앞으로 이동해서;; 그러한 춤판이 벌어졌다니;; 아쉽네요. ㅠㅠ
      메이데이의 즐거운 피로감, 아직 여운이 남아있는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