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은 특정한 관계 속에서 장애가 된다
그린비 이야기
2012/05/14 09:00
지난 5월 11일 금요일, 『장애학 함께 읽기』의 저자 김도현 선생님께서 ‘철로에 몸을 묶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장애학 강의를 해주셨습니다(이 강의는 알라딘인문학스터디 14기 “우리들의 리얼한 사회탐구생활”의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독자 분들께서 와 주셨고요, 강의가 끝난 후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도 열띤 대화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강의 현장을 간단히 스케치해 보았습니다.

김도현 선생님과 함께하는 '사회탐구생활' 시간!
무엇이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가
김도현 선생님께서는 “불과 3, 4백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장애,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존재가 분명 있는데,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말들을 조용히 경청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은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는 칼 맑스의 너무나도 유명한(이제는 상식이 되어 버린) 명제를 언급하기도 하십니다. 여기에서 ‘흑인’과 ‘노예’의 자리를 각각 ‘손상’과 ‘장애’로 대체했을 때, 그 명제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상식’으로 통하고 있나요? “손상은 손상이다. 특정한 관계(비장애인들의 억압과 차별) 속에서만 그것은 장애가 된다”라는 말이 상식으로 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앎이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왜 ‘장애학’을 함께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조금은 더 분명해지는 것 같지 않으셨나요?
무엇이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가
간단한 수화와 지화를 알고 있는 이에게 농인과의 소통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농인과의 소통은 어려운 것, 농인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자”라고 너무 빨리 단정 짓는 것 아니냐고, 선생님은 반문해 오십니다. 더욱이 외국어의 서투름으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 것에 반해서요. 무엇이 진정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금요일 저녁, 많은 분들이 공부를 하러 오셨습니다. 반가워요~ >_<
버스를 타는 것 자체가 투쟁인 일상
“철로에 몸을 묶는 사람들”이라는 이번 강의의 제목과 연관이 깊은 이동권 투쟁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선생님은 직접 경험하신 일화를 하나 들려 주셨습니다. 이동권 투쟁의 일환으로 시작한 ‘버스타기 투쟁’의 첫날의 기억이라고 하시면서요. 선생님께서는 당시 함께 버스를 탄 활동가 및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버스요금을 걷고 계셨는데, 그 중 40대 중년의 어떤 형님이 “근데 도현아, 요즘 버스요금이 얼마냐?”고 물어 오셨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추방’된 게 아니라면, 40대의 성인이 버스 요금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될 수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셨다고 해요(물론, 높으신 기업인, 정치인 분들의 경우도 제외하고요;;;).
사실 이 일은 아주 작은 사건일지도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마음 한편으로 ‘그래도 예전보다는 장애인들을 둘러싼 조건들이 많이 바뀌지 않았느냐’고 생각하시던 것을 고치게 된 계기였다고 하네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도 장애인 운동에 몸담을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도 하고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입니다. 2011년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외출 빈도가 한 달 3회 이하인 장애인이 전체 장애인의 10% 가까이나 되고, 중증 장애인의 경우 그보다 더 많은 분들이 외출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까지 서울 시내 저상버스 도입비율이 50%'나' 된다고 흡족해하던 게 떠올라 참 부끄러웠습니다. 장애인 당사자들에겐 ‘버스타기 투쟁’ 이전에 ‘버스를 타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평소 이 투쟁에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늘 쫓기듯 사는 우리가 이 투쟁에 연대할 준비는 되어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장애인들의 집단 승하차로 운행이 늦어지자 한 시민이 호통을 친다. "당신들 때문에 30분이나 늦어지고 있잖아!" 그 말에 누군가 답한다. "시민 여러분, 우리 때문에 30분이 늦어졌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장애인들 대부분이 30년 평생을 집 밖에 나와보지도 못하고 갇혀 지냅니다. 이에 대해 이 사회는 책임져야 합니다!" - 강여사/정서방, 「‘나쁜 장애인’들의 현장을 기록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4월 14일자 기사 중에서

장애 문제는 왜 우리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가
강의의 막바지에 ‘장애인이 좋으면(행복하면), 비장애인도 좋다(행복하다)’, ‘비장애인인 나도 갑자기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는 식의 캐치프레이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 이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점들을 놓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성 문제’를 ‘여성들만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성들만의 변화를 요구하지도 않고요. 남성이 바뀌어야 여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여성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지요. ‘여성 문제’의 한 축에는 이미 남성이 ‘일방’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 문제는 남성 일반이 여성을 억압했기에 일어났던 결과라는 통찰에 동의하신다면, 이 의견에 반대하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장애 문제’는 어떠한가요? 비장애인들은 ‘장애 문제’에 있어서, 이미 한 일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장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인식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사실 이 사고방식대로라면 보험을 하나 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뜨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 것이지요. 장애학 함께 읽기를 넘어 함께-하기로 가기 위해서, 연대의식 이전에 이러한 (좀더 무거운) 책임의식이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리얼한... 조모임!
지난 시간에 비해 조모임 시간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열 명이 넘는 분들이 강의를 듣고 느낀 점, 궁금한 점들을 1시간 가까이 자유롭게 말씀해 주셨는데요. 본 강의만큼이나 알찬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이날 모임의 아쉬움은 igreenbee.net에서 조모임 2.0으로 이어나가기로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대적 의미의 장애가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해 묻고, 선생님께서 여기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를 해주셨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노동이 불가능한 몸을 의미했던 the disabled body가 오늘날 의미에서의 ‘장애’, disability로 전환되었던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장애라는 개념 자체의 폭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은 사람들을 토지로부터 이탈시키는 과정과 더불어, 이들을 임노동 관계로 포섭하기 위한 강제 수용과 훈육 과정을 동반하게 됩니다. 서구의 역사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구빈원(work house)은 바로 이러한 거리의 부랑자들을 수용했던 강제 노역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빈원은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거나 부양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모두를 수용하였고, 그 안에는 백치, 광인, 만성질환자, 노인, 부랑자들이 여타의 실업자들과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훈육하고 나태를 방지하기 위핸 일정한 기준에 따라 그들을 분류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 핵심적인 목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에 적응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적응할 수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구빈원과 같은 시설 밖에서의 구체 조치를 폐지한 영국의 1834년 「개정 구빈법」은 빈민들을 분류함에 있어 아동, 병자, 광인, 심신에 결함이 있는자, 노약자를 특별히 중요한 다섯 개의 범주로서 설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주에 들어 들지 않는 사람들을 잔여적인 방식으로 노동 능력자로서 간주했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다섯 가지 범주 중 아동을 제외한 네 가지 범주가 바로 장애인을 구성하게 됩니다. 즉 일을 할 수 있는 몸(the abled bodied)을 선별하기 위해 일을 할 수 없는 몸(the disabled bodied)을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고, 이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장애’(disability)라는 개념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일을 할 수 없다고 규정된 장애인들을 보다 전문화되고 특화된 수용시설, 격리지구, 특수학교 등으로 밀어 넣는 것이 정당화되었던 것이지요.
- 김도현, 『장애학 함께 읽기』, 78~79쪽
늦은 시간까지 강의를 열심히 듣고, 또 조모임 시간에 솔직한 생각들을 함께 나누어 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 7시에는 알라딘인문학스터디 세번째 시간이 있고요, “혁명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한형식 선생님께서 ‘아시아 공산주의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해주실 예정입니다. 아시아 공산주의의 성과와 실패 속에서, 기존의 역사적 평가와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편집부 김미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도현 선생님의 블로그로 이동합니다.

조모임은 igreenbee.net에서 계속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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