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시집가고 싶다
 
정경미

내가 오후에 활보하는 제이(J)를 소개하겠다. 제이는 뇌병변 장애인이다. 손발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혼자서는 일어서거나 걷지 못하고, 물건을 집거나 글씨를 쓰거나 밥을 먹지 못하므로 주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한다. 발음기관의 근육이 원활하지 않아 말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처음 만난 사람은 제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하니 제이의 부모님이 갓난아기를 안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자라면서 언어치료, 작업치료 등등 좋다는 치료는 다 받았다. 열 살 무렵에는 기도원에 가서 엄마랑 같이 일 년 남짓 살면서 기도 치료까지 해봤는데… 치료의 효험인지 어느 날, 목사님이 안수기도를 해주시는 중에 제이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는 기적을 보이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건 그때 잠시뿐이었고, 제이는 다시 휠체어로 돌아와 생활해야 했지만, 어릴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신경근육의 마비 증세가 많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어릴 땐 손발이 거의 문어발처럼 멋대로 움직였는데 지금은 많이 가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제이는 열두 살 때 처음 학교에 갔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학교 보낼 엄두를 못 내고 집에서 부모님이 글자도 가르치고 셈도 가르치고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제이가 울면서 이렇게 일기를 쓰다가 잠들었다고 한다. “바람이 분다, 학교에 가고 싶다.” 제이는 글씨를 못 쓴다. 글은 익혔지만 손의 근육이 마비되어 손가락으로 연필을 쥐고 또박또박 노트에 글을 쓰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제이가 글을 썼다. 흔들리는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글자들은 폭풍 속 나무들의 아우성 같다. 선이 떨리고 이리저리 엉킨 이 글자들은 형태를 분명히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거기엔 분명한 어떤 절박함이 있었고, 그것이 가슴을 후려쳤다. 이 글을 보고 제이 부모님은 황급히 학교를 알아보았고, 재활교육을 하는 특수학교에 제이를 입학시켰다. 이곳에서 제이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초등학교 때는 열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이 한 방에 사는 소아병동에서 생활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기숙사로 옮겼다. 한 방에 네댓 명이 같이 지내다가, 주말에는 부모님이 데리러 와서 집에 다녀온다.

제이가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한 것은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들어가서 제이는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 들어가기 전과 다름  없이 혼자 지내는 때가 많았다. 성격이 소극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학교에 늦게 들어간 탓에 다른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많아 쉽게 섞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적표의 가정통신란에는 “조용하다, 얌전하다”는 말이 주로 적혀 있었다. 마음속에는 열정이 들끓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교실 한 켠에 조용히 앉아 창밖을 멍하게 내다보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다. 아는 게 많고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는 똑똑한 친구. 자기를 표현하는 게 늘 자신이 없었던 제이로서는 존경심 반, 부러움 반으로 이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말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때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둘이 친하게 지내라”고 같이 불러 말을 붙여줘서 친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다른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게 되었다. 군것질하고 수다 떨고… 기숙사에서 같이 사는 언니 동생들과도 친해졌다. 고1 때 담임선생님… 키 크고 잘생기고 다정한 총각 선생님을 좋아해서 꽃도 선물하고 편지도 쓰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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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마음의 풍금」의 한 장면

이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대학 진학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제이는 “난 대학 안 간다, 시집간다”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교사가 된다거나 화가가 된다거나 하는, 뭔가 특별한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가서 공부한다는데… 제이는 암만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특별한 꿈이 없다. 뭘 꼭 하고 싶은 게 없다. 다만, 제이가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다. 아이 낳고 기르며 화목한 가정을 꾸미는 것. 이, 특별히 꿈이랄 것도 없는, 소박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꼭 가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암… 그것이 결코 ‘소박한’ 소망이 아닌 모양이다. 학교 졸업하고 근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난 시집갈 거니까 대학 안 간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천생배필을 만나기는커녕 동네 머슴애랑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서른 살 생일을 맞이할 줄이야!

“세상은 보이는 것과 달라. 예를 들어 임창정 오빠를 사람들은 ‘까불이’라고 무시하지만, 그건 사람들한테 웃음을 주기 위한 거야. 창정이 오빠가 무대에서 춤을 추다가 넘어졌어.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일어나지 못했을 텐데 오빠는 금세 일어나 다시 춤을 췄어. 그 모습이 나에게 ‘제이야, 힘들어도 포기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제이는 어릴 때부터 시를 써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그것을 글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바람이 분다, 학교에 가고 싶다.” 이것은 어쩌면 제이가 처음으로 세상에 발표한 시인지도 모른다. 제이에게는 세상 모든 일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말이 되고, 그것을 글로 쓰고 나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고 한다. 제이는 이제 서른 살이다. 서른 살 생일을 맞으면서 제이의 심사는 복잡하다.

이제는 그냥 앉아서 기다려서는 안 되겠어! 짝이 나를 찾아오려고 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잘 찾아올 수 있다면서… 서른이 되면서 제이는 더욱 분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복지부에서 제공하는 복지 일자리를 나가고, 장애인 시설조사 모니터링 아르바이트도 하고, 인권강사 양성 아카데미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를 열심히 쓰고 있다. 시는 제이에게 미지의 연인과의 대화인지 모른다. 손이 없어도 만질 수 있고, 발이 없어도 그에게 다가가는 방법, 그것이 제이에게는 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그가 내 앞에 서 있는 걸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제이는 열심히 시를 쓸 것이다.

- 내일 모레, 내 생일이야.
- 축하해!
- 아빠가 생일 선물 뭐 사줄까 묻더라구.
- 뭐 사달라고 했어?
- 이제 날씨도 더워지구 해서…
- ……?
- 보신탕 사달라구 했지!

2012/05/24 09:00 2012/05/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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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프턴 2012/05/24 18:4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그린비 2012/05/25 10:01

      반갑습니다. ^^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