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대면 불능자의 반면교사 여행기


“여행을 좋아하시나요?”라는 질문에 “No”라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마는, 저 또한 여행을 매우 좋아합니다. 특히 대학 시절에는 여행에 대한 ‘로망’으로 들끓었지요. 하지만 좋은 거 보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는 소위 ‘관광’은 하기 싫었고 사람들의 욕구를 금전적 소비로 전환하기 위해 착실히도 진화해 가는 자본주의의 꼬락서니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라고 해도 뭐 쌩구라는 아닙니다만 일단, 누가 뭐래도, 돈이 없었습니다. 당장 저녁 밥값 3천 원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학생 주제에 여행은 무슨 여행입니까…….

그래도 1년에 한 번쯤은 꾸역꾸역 ‘탈주’를 감행했습니다. 맡고 있던 학회나 학생회 일에 치일 때면, 혹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우린 앞이 안 보여서 미치겠어” 노래가 절로 나올 때면, 인생이란 무엇이더냐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만 건지면 그만이더냐 등등의 회의가 닥칠 때면 에라 모르겠다, 대강 가방을 싸서 집을 나선 게지요. 어느 해 8월에도 그랬습니다. ‘가는 날이 올 최고기온 경신 날’이라는 옛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어느 날, 자전거를 이끌고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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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의 로망

그렇게 떠난 길. 평택 어디쯤 지나서였던가요? 왕복 2차선 국도 양옆으로는 푸르른 논이 펼쳐져 있었고, 민가에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뉘엿뉘엿 저무는 석양이 한낮의 고됨을 보상해 주는 멋진 풍경을 선사했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개들이 다정하게 짖어 댔고, 논두렁에 걸터앉아 잠시 목을 축이려니 벼를 살펴보러 나오신 할아버지께서 주름이 깊게 팬 눈으로 인자하게 웃으시고 할머니께선 “총각~ 밥은 먹었나? 우리 집에 가자”라고 친절하게 말까지 붙여 주셨습니다…… 같은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하셨습니까? 흥! 그런 ‘비현실적인’ 풍경 따윈 퍽이나 다정한 그 동네 개한테나 줘 버리라죠. 도로변엔 물류센터로 보이는 거대한 창고와 공장들만 우뚝했고, 햇볕은 작렬! 안면은 기괴! 사지는 흐물! 언덕길이라도 만날라 치면 입에서 욕지기가 절로 나옵니다. 갓길은 좁아 잠시 쉴 곳도 마땅찮았고,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웬 미친놈이 이 땡볕에!!’라는 자신들의 감상을 마치 아카데미 조연상이라도 노리는 듯 말 한마디 없이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습니다. 고갯마루의 정체불명 밥집에서 무뚝뚝한 주인아줌마가 차려 주는 짜디 짠 김치찌개를 몇 숟가락 뜨고 다시 자전거에 오르려니 지금 나오는 게 한숨인가 눈물인가……. 아아, 정말 여행의 로망과 현실은 이리도 다른 것인가요!

그 뒤로도 삽질은 계속되었습니다. 마침 개통한 천안행 지하철을 타고 종점에 내려 무작정 남쪽으로 걷다가 깜깜한 지방국도 갓길에서 집채만 한 덤프트럭이 선사하는 상콤한 바람에 죽음의 공포를 맛보기도 하고, 그런 국도에서 종종 발견되는 ‘천상의 맛 꿀복숭아’의 빈 판매대에 쭈그리고 앉아 저녁으로 다 녹아 흐물거리는 초코바를 오물거리기도 했습니다. 혼자 부석사를 들렀다가 무작정 고치령을 넘겠다고 나섰는데, 도무지 길이 끝이 없는 데다가 산은 깊지, 빗줄기는 작렬하지, 차는커녕 사람도 코빼기도 안 뵈지,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래지, 휴대전화는 통화권 이탈이지, 그야말로 ‘나모도 바히돌도 업슨 뫼헤 매게 쫓긴 가토리 안’을 느껴 보기도 했지요. 젠장, 그런데, 도대체, 왜 저는 이렇게 중독이라도 된 듯 길을 나서는 것일까요? 저는 어떤 여행을 꿈꿨던 것일까요?

소설가 공선옥 씨의『마흔에 길을 나서다』라는 책을 읽어 보셨는지요? 2002년인가 월간『말』에 연재되었던 꼭지를 묶어 펴낸 이 책은 그야말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세 아이의 밥을 한가득 해놓고 무작정 길을 나서는 공선옥 씨는 그 길 위에서 만난 약장수 할매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화전민들의 삶터에 조심조심 발을 들여놓기도 합니다.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그래도 사는 날까정은 살아야제 어쩌겄소”라며 땅을 고르는 구십 노인을 바라보고, “디스 한 갑으로 일주일을 사는” 촌로들과 함께 방바닥에 등을 지집니다. 그들의 핍진한 삶 속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그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더랬지요. 아마 전 그런 여행을 동경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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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장수 지복덕 할매의 겨우살이
_ "도붓장수 지복덕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 애초 내 여정의 목적은 아니었다. 단지 우연이었을 뿐이다. 길을 떠나니 길 위에서의 한 생애를 만난 것일 뿐. 우연이라고 했지만 또 그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니."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14쪽)

꼭 그렇게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만나지 않더라도, 온전히 나를 만나고 오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특히 남자라는 동물이 더 심한데, 웬만큼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고서야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을 하기가 은근히 쉽지 않잖아요? 볼 것도, 할 것도, 재밌는 것도, 짜증나고 신경 쓰이게 하는 것도 많은 요즘 세상엔 특히 더 그렇지요. 그런 핑계로 어딘가 ‘다른 공간’에 스스로를 위치시켜 보면 나를 좀더 투명하게 바라보고 대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 마음을 쫓아 길을 나서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한 친구가 저를 표현할 때 썼듯이, ‘뼛속부터 근대인’이었습니다. 이렇다 할 사춘기도 없이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묵묵히 마스터한 청년에게는 그렇게 세상에, 나 스스로에 몸과 마음 전체를 오롯이 여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일상을 벗어나 길 위에 섰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걸어 온 거리를 계산하고, 어디로 가는 것이 좀더 ‘합리적’일까를 고민하고, 얼마 없는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효율적’일까를 저울질하고 있었던 거죠. ‘가능한 수많은 선택들’을 기뻐하기보다는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가능한 조건들’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그럴수록 무엇인가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은 점점 강해졌고, 여행은 점점 제게서 분리되어 갔습니다. ‘삽질’은 그 결과였던 게지요. 어라, 가만……. 그러고 보니 이쯤 되면 이건 여행 이야기가 아니네요? 평소 제 모습, 제 삶의 모습과 똑같……. 아이고, 이런!

결국 여행도 여행하는 자의 모습을 닮게 마련인가 봅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유의 벽을 자유로이 넘나들었던 연암 박지원이기에『열하일기』 같은 멋진 여행기를 쓸 수 있었듯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의 삽질 여행들은, 비록 그 ‘안’에서 저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 ‘자체’로 제 모습의 반영체였던 것입니다. 바라던 방식도 아니었고, 썩 마음에 드는 결과물도 아니었지만, 어쨌건 저 자신을 바라보게 해주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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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作 <삽질하는 남자들>
_ 삽질하는 내 모습을 대면하게 하고,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해준 자전거 여행의 묘미.

이렇게 제 몸 구석구석에 잔뜩 끼어 있는 “그때 그때의 그 때♬”를 발견했으면 그것을 벗겨 내려 노력하는 것이 응당 사람 된 자의 도리일 터. 하지만 거참, 그게 어디 쉽나요. 저는 요즘도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저를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관성’이라는 놈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실감할 때마다 새삼 놀라곤 합니다. 아이고, 또 계산기 두드려! 또 사서 걱정이야! 또 도망갈 궁리야! ……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는 더 강력한 이태리타월을 양 손에 장착하고 맞부딪혀 팡팡 소리를 내곤 하지요. “자, 덤벼라, 이놈아. 내 아무리 삽질해도 지치지 않으리라! 게다가 내 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실망스럽고 찌질하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정도의 용기는 갖고 있다규!”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도 여행이 제게 안겨 준 일종의 면역력 덕택일지도 모르겠어요. :)

- 편집부 태하

2009/07/09 11:10 2009/07/0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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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저먼시네마 2009/07/09 12:21

    뼛속부터 근대인.. 와닿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어요^^

    • 그린비 2009/07/09 13:30

      블로그 첫 데뷔작에 요로코롬 댓글을~ 감사합니다. ^^

  2. ego2sm 2009/07/10 09:55

    아, 삽질 여행 안 가본지....
    언 5년전인 것 같네요.
    첫 데뷔작 축하드려요.^_^

    • 그린비 2009/07/10 10:08

      아, 축하 감사합니다 :)
      올 여름도 최고기온을 경신한다는데 한 번 도전해 보실까요?ㅎㅎ

  3. 맑음 2009/07/10 11:14

    여행 같은 거 안 다녀도 충분히 삶 만합디다. 먹고 사는 일에 치여 20년 넘도록 제대로 된 나들이조차 한번 못하며 살았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이맘때 훌쩍 여행을 다녀왔는데.... 처음에는 도무지 젊었을 때 같은 신명이 안 나 스스로 '나도 이제 먹고사니즘 외에는 관심이 안 생기는 속물이 다 됐구나' 하고 자괴감에 빠졌었는데, 그런 다음 순간부터 갑자기 여행을 진짜로 즐길 수 있게 되더군요. 여행을 통해 뭘 얻어야지 하는 기대 따위 버리고, 말 그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한번 떠나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작년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난 수십 년 동안 쌓인 삶의 피로에 짓눌려 뭔가 단단히 탈이 나 버렸을 것만 같아요. 여행, 안 떠나도 충분히 살 만하죠. 하지만 여행을 필요로 하는 마음조차 잃어버린 삭막한 가슴으로 사는 건 대단히 서글픈 일일 겁니다.

    • 그린비 2009/07/10 12:34

      맑음님, 안녕하세요.
      여행, 안 가도 그만이지만(!) 자기를 둘러싼 배치 속에서 잠시 벗어나 보는 것은 필요한 것 같아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