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런던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이유
― 젠더와 인종 그리고 새로운 언어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


문명진(평화바닥)

런던에서 유색인종이 되어 보는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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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유로운 세계」
_ 폴란드, 우크라이나, 이라크 등에서 런던으로 온 이주노동자들의 수모와 노동착취. 주인공 앤지는 이주노동자 직업소개소의 계약직 사원이었지만, 상사의 성희롱을 참지 못해 부당해고를 당한 후, 결국 그녀도 그들을 이용하게 된다.

켄로치 감독의 영화 「자유로운 세계」에서는 런던에서 하루 벌어 하루 생활을 하는 동유럽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엿볼 수가 있다. 내가 런던으로 거주를 옮기기 전에 6개월 정도 머물렀던 런던 남부 해안의 조그만 도시 헤이스팅스에는 동유럽 쪽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적어도 피부색은 하얗기에 ‘유색인종’의 범주에는 들지 않는)들은 꽤 많이 존재한 반면, 이슬람 출신 혹은 아시아 계통의 나와 비슷한 피부색을 가진 유색인종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길을 지나가는 일군의 ‘틴에이저’들이 유색인종 학생들에게 야유나 괜한 시비를 거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고, 특히 금요일 밤에 펍(Pub)에 나가면 꼭 한 번씩은 술에 취해 외국 학생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동네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건, 이런 경험들에 대한 내면화된 불쾌함 혹은 불안함들이 런던으로 거주를 옮기고 나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런던이라는 도시가 소위 토종 영국인보다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기에 내가 ‘튀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컸던 것 같다. 즉, 런던에서는 나도 그냥 ‘평범한’, 눈에 띄지 않는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에 따라 외부의 시선에 대한 긴장감이 풀리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던 것이다.

한국인이 두려워하는 것 : 비(非)백인

어느 책에선가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을 읽은 기억이 난다. 보통 우리는 인종 갈등이라고 하면 백인과 흑인이라는 두 가지 범주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청교도-앵글로 색슨” 출신 백인을 최정점으로 하는 인종의 위계 안에서는 예컨대 유대인, 아프리칸, 캐리비안 연안 출신, 이태리 출신, 동구권 출신, 중국계 등등이 더 높은 지위를 놓고 경합을 벌인다는 것이다. 90년대 초에 LA에서 있었던 한인들에 대한 흑인들의 공격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읽었던 것 같다. 인종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억압받는 각각의 다른 인종들이 서로 간의 경쟁 아닌 경쟁을 벌이는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인종주의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된다는 요지였다. 이와 같은 분석은 군 가산점 폐지를 두고 뭇 여성계를 싸잡아 비난하는 예비역 집단으로부터 야기되는 갈등이나 정규직 노조의 비정규직에 대한 냉대와 무관심 등 다른 사안들에도 동일한 논리적 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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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거리

영국 어학연수를 준비하며 이것저것 알아보던 시절, 특정 어학원을 평가하는 한국인들의 비공식적인 그러나 꽤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준거 중에 하나가 아랍권 출신 학생들의 비율이었다. 마치 한국 영어학원에서 흑인 영어 강사를 찾아보기 힘든 것처럼, 유학 시장에서 특정 문화 혹은 인종에 대한 편견은 어학원 선택의 과정에서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한국인이 유럽에서는 아시아에서도 중국인, 일본인 다음에야 비로소 인식이 되는 아주 낮은 존재감을 가진 인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다른 인종을 따지는 뭇 한국인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과연 이 편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려운데, 왜냐하면 나도 막상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한 남학생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을 때 다른 학생들에게 느끼는 일반적인 마음의 벽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종주의를 돕는 여성주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그 학생은 유난히 여성을 밝혔다. 툭하면 자신에게 뽀뽀를 해 달라고 했고, 주변에 있는 여학생들의 어깨나 허리를 감싸 안는 식의 행동을 좋아했다. 사실 이러한 행동은 그 사람이 누구이냐에 상관없이 비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한편, 내가 다니던 어학원에 있던 리비아 출신 다른 학생은 사람들에게 반가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나 거칠어서 다음부터는 다시는 인사를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한때 나는, 그들이 세련되지 못하고 자주 반(反)여성적인 모습을 보여서 나의 혹은 사람들의 호감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출신 배경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덜 관용적으로 대하게 만드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했다. 마치 집회에서 욕하고 담배 뻑뻑 피워 대며 으스대는 노동자 남성들에게 비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무슬림 출신 학생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출신 배경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행동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내 스스로 벽을 세우게 된 것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난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선언하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인종 혹은 문화에 대한 고민을 접고 지내다가 다시금 같은 고민을 떠올리게 된 순간이 있었다. 작년 여름,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하면서 어학원에서 만났던 피렌체 대학교 학생을 다시 만났다. 그 친구가 자기 대학을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좋다고 따라갔는데 마침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대학 입구의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돈을 내지 않으면 화장실을 쓰기 어려운 여행지에서 대학 구경도 하고 화장실도 쓸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학이 개방되어 있지 않으리란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대학 바깥 주변만 서성이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를 가이드해 준 이 여학생 친구 말에 따르면, 최근 2~3년간 대학 건물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노숙자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해서 대학 측에서 수업이 없는 날에는 대학 문을 아예 닫아버리기로 했다고 한다. 이 친구는 안 씻고 청결하지 못한 노숙자들이 학생들에게 큰 위협감을 주는 존재였다고 말하면서 대학의 그러한 결정을 지지한다는 말을 했다.

앞서 언급한 경험들을 반추하다 보니 노숙자나 아프리칸, 아랍권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그들의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그리하여 ‘타인에게 위협감을 주는’ 이미지와 결합되어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초기 근대 학교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위생에 대한 관념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노숙자나 유색인종이 ‘매너’도 모르고 지저분한 존재로 묘사되어 왔던 근대의 인식 방식이 현재에도 여전히,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주의의 논리가 인종주의의 작동에 이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확 커지던 순간이었다.  

이처럼 “여성과 노동”과 “여성의 각성”은 그 시기의 다른 페미니즘 텍스트들처럼 확고하게 여성이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근대성을 다시 정초하면서 진화론적 주장이나 남성 주도적 목적론과 공공연하게 대결하는 대안적인 역사를 창조한다. 그러나 슈라이너와 스위니가 옹호하는 여성성은 전적으로 백인의 여성성임이 드러나는데, 그 이면에는 그들이 인종 간의 위계질서를 거의 아무런 의심 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암묵적인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이 그러한 문화적 서열을 필연적인 것으로 가정한다는 사실은 식민주의적․우생학적 이데올로기가 그 시대의 다소 진보적인 관점에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근대성과 페미니즘』, 250~251쪽)

나는 헤이스팅스에서 동양인으로서의 자각을 심각하게 하다가 런던의 다양한 유색인종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편안함마저 느꼈지만, 보통 더 공격적인 행동을 많이 보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아프리칸이나 무슬림들에 대해 두려움과 비호감을 느끼는 내 주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나도 여성들의 느낌과 경험을 공감할 수는 있었지만, 한편으론 내가 그런 여성들의 편에 서는 것이 위에 인용한 글에 제시된 서구 1세대 페미니스트가 보여준 한계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남성들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공포심이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과 결합하면서 일면 결과적으로 여성이 넘어서야 할 근대적 인식론에 오히려 협조하게 되어버리는 양상을 보이는 것.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여성주의 운동에서 성(性)적 자기결정권 주장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는 정희진의 글에서 분석된 바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창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 이론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 즉,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은 근대 자유주의의 남성 논리를 비판하기보다, 기존의 논리에 여성도 포함시켜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고, …… [따라서 이것이] 여성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의 도전』, 177~178쪽)

가부장 ‘사회’ 속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문제 제기하면서 해결책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시하는 것은 여성의 성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문제의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는 남성중심적 자유주의 사상에 도리어 해결책을 호소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과연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런던에 머물며 젠더와 인종 사이의 역학에 대해 고민을 하던 시절에는 여성주의냐 반(反)인종주의냐 하는 식으로 이분법에 빠져버려서 둘 중에 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가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스스로 자신을 가두며 힘들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자기 경험을 근거로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는 여성들을 보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계몽적 남성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참기에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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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과 토마스 로런스의 여성
_ "진리라는 것 속에는 어떤 것이 표현되거나 숨어 있는가?"를 묻고 있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237쪽) 우리는 자연스레 토마스 로런스의 여성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우리는 왜 우리와 닮은 얼굴이 노랗고 쌍꺼풀이 없는 타히티의 여인들보다 백인 여성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인종 차별이나 인종 갈등과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우리도 이런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새로운 언어의 필요성

외국에서 비백인-남성으로 체류하는 동안 겪은 일련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여성주의니 인종주의니 하는 언어로 사유를 해보았지만 이 언어들이 나의 고민들을 진전시키는 데에 유용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들었다. 동일한 ‘여성’의 범주 안에서도 ‘진골’ 백인 여성의 경험과 한국인 여성의 경험이 다를 것이고, 혹은 동일한 ‘무슬림’ 내에서도 출신 국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경험이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들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뭉뚱그려서 ‘여성’이라든가 ‘인종’이라는 한정적인 언어로 이분법적인 사유를 하는 것이야말로 문제 설정을 제대로 못했음을 반증하는 게 아니었을까. 중요한 것은 여성주의나 인종주의라는 기존의 언어가 포괄하지 못하는 차이에 주목하면서 한 현상에 대해 좀 더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열어두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한 정희진의 글은 나를 되짚어 보게 한다. 
 
여성주의 인권은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근대적 개인, 근대적 주체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과 동시에, 기존 인권 개념의 기준 자체에 도전한다. …… 이 같은 인권, 평등 개념의 재구성은 성별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 인권운동은 사회적 약자에게 인권의 개념이 확대 적용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인권 개념을 문제시, 재구성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인권의 운동’ 과정이기도 하다. 인권운동은 인권 개념의 운동을 낳고, 동시에 새로운 개념은 인권 운동을 발전시킨다.
(『페미니즘의 도전』, 178~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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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8 11:06 2009/07/0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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