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 (2)

― 차아다예프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탄생

최진석 (연구공간 수유+너머)

표트르 야코블레비치 차아다예프는 1794년 모스크바(혹은 노브고로드)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모계로는 러시아의 기원인 키예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리투아니아 출신의 부계는 17세기 초에 러시아 귀족에 편입되었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황제의 궁정에서 복무해 왔기에, 훗날 벌어질 운명의 사나운 변덕만 없었더라면 차아다예프가 이런 ‘가문의 영광’을 충실히 따랐으리란 기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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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차아다예프
_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던져준 지식인 차아다예프.

이후의 지적 이력을 염두에 둘 때, 그가 조실부모했다는 사실은 꽤나 상징적이다. 친척들의 손에서 자란 어린 차아다예프의 정서적 후견이 되었던 것은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인 보모와 가정교사에게 양육되고, 어릴 적부터 프랑스 문화를 숭배하는 사교계에 출입함으로써 모국어인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가 그의 내밀하고 진심 어린 언어가 되었다는 게 그렇다. 공문서를 작성할 때나 집안 농노들, 하인들과 대화할 때는 러시아어를 쓰기도 했지만, 당대 귀족들이 선호하던 사교어는 단연 프랑스어였고, 그의 저술들 거의 모두가 이 세련된 ‘문화의 언어’로 쓰여졌다는 사실은 비단 차아다예프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근대 러시아 지식인들이 유럽에 대해 갖고 있던 태도를 잘 보여 준다. 한편 사유를 위한 지적 도야는 주로 독일 철학을 통해 이루어졌다.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초빙 교수로 일하던 여러 독일인 교수들이 빈번히 그의 집으로 초대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차아다예프는 ‘사상의 고향’ 독일과 만났다. 이렇듯 ‘고귀한 출생’과 ‘유복한 가문’이란 배경이 한 개인의 정신적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을 리 없다. 세련된 문화적 감수성과 이상주의적 사변벽은 차아다예프에게 유럽에 대한 강렬한 지향을 심어 두었으나, 그것이 당대 러시아 민중의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음은 분명했다.

1808년 모스크바 대학교에 입학한 차아다예프는 철학, 예술, 러시아와 유럽 문학, 정치경제학 등 어지간한 인문·사회과학 과목들은 거의 다 공부해 본다. 지적 관심은 넘치고 흐르되 별로 할 일은 없던 이 귀족 자제는 당시 러시아 지식 사회에서 큰 유행을 타고 있던 독일 철학에 쉽게 경도되었고, 칸트, 피히테, 셸링 및 낭만주의 철학자들의 저술들을 열심히 읽어 댔다. 특히 셸링에게 깊이 감화되었던 차아다예프는 훗날 그를 직접 찾아가서 사상과 역사, 종교 등 자신이 마음속에 안고 있던 여러 문제들에 관해 직접 조언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 시절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니키타 무라비에프(Nikita Muraviev), 이반 야쿠슈킨(Ivan Iakushkin) 등 훗날 ‘12월당’ 사건을 이끌었던 미래의 혁명가들을 만나 교제했다는 사실이다. 젊은 그들은 유럽의 사상과 러시아의 현실, 유럽의 과거와 러시아의 현재, 유럽의 자유와 러시아의 압제에 대해 떠들었고, 그들의 불투명한 미래에 절망과 희망의 질문들을 던져 보곤 했다.

1812년, 운명의 첫번째 반전이 갑작스레 닥쳐왔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로 쳐들어왔고, 군복무를 시작한 차아다예프 등은 허둥대며 퇴각하던 모양새 꼭 그대로 정신없이 파리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승리의 희열 대신 말 못할 당혹감을 안고 돌아왔다. 러시아 지성사에서는 이 감정을 흔히 서구에 대한 ‘열등감’이라 표현한다. 물질과 생활, 사상과 문화의 모든 면에서 서구는 러시아의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민족성이란 무엇인가, 러시아는 유럽의 일부인가 전혀 다른 무엇인가, 러시아는 서구를 뒤따라야 하는가 혹은 나름의 역사적 소명을 지니고 나아가야 하는가 등등 후일 빌링턴(James Billington)이 제기한 ‘러시아사의 저주받은 질문들’이 이 무렵부터 맹렬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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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러시아 군인들의 사열 장면
_ 근대 초기 맺어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서구가 대러시아 정책을 지칭할 때에 '동방정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러시아가 유럽을 '서방'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한 맥락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말입니다.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군복무를 중단한 차아다예프는 1823년부터 3년간 유럽에 체류한다. 존경하던 셸링을 몸소 찾아가 러시아의 운명과 역사적 소명에 관해 질문하고 나름의 답변을 받아 보기도 했다. 19세기 전반에 많은 러시아 귀족 지식인들이 유럽을 직접 탐방하고 셸링과 헤겔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을 찾아가 비슷한 질문들을 던지곤 했는데, 차아다예프가 그 전통의 시발점인 셈이다. 그러다가 1825년, 12월당 반란의 소식을 듣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차아다예프가 직접 연루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해외에 나가 있던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옛 친구들이 차례로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몽둥이 차르’의 철권통치가 시작되면서, 소일 삼아 귀부인들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며 8편의「철학 서한」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러시아 지성사에서 가장 큰 스캔들을 일으킨 이 서한들이 작성된 것은 사실 1828~1831년 사이이다. 이웃 영지의 여지주인 예카테리나 파노바(Ekaterina Panova)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되, 평소 사회와 역사, 민족, 종교 등에 관해 품어 왔던 자신의 식견과 통찰을 동반한 이 서한들은 곧장 사교계의 분란을 일으켰다. 소위 ‘서구의 충격’에 자극된 급진적 지식인들은 열렬한 환영을 표시했지만, 슬라브 민족의 전통을 옹호하는 이들에겐 우려스런 ‘자학사관’처럼 비쳤던 것이다. 1836년 『망원경』지를 통해 공식 발표되기까지 차아다예프는 서한의 내용을 꾸준히 수정해 나가야 했다. 그럼 이 서한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차아다예프에 따르면, 러시아의 역사적 의미는 서구의 역사를 하나의 보편사로, 인류 역사의 전체로 상정할 때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난다. 1814년 러시아가 직접 가서 목도했듯, 유럽은 역사를 가장 앞장서서 달려가며 주변 세계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가운데 러시아는 어디에 있느냐가 이 사상의 관건이다. 유럽과 나란히 뛰지 못한다면, 한 걸음 뒤도 좋고 한참 후위에 뒤처져도 좋다. 문제는 러시아는 세계사라는 흐름, 유럽이 주도하는 보편적 역사와 전혀 무관하게 동떨어져 고립되어 있다는 데 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멈춰서 버렸다는 데 러시아의 비극이 있다.

러시아의 역사적 지체 혹은 정체는 장엄한 문학적 수사로 치장되어 표현된다. 신은 러시아를 버렸으며, 러시아는 동방에도 서방에도 속하지 못한 그저 고아 같은 존재일 따름이다. 언제나 떠돌이 유랑자로서 역사의 변방에 머뭇거릴 뿐이었으며, 한 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했던 치열한 투쟁과 각성의 기억조차 없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러시아는 줄곧 잠에 취해 있었으며, 자신을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아무런 기여할 바를 찾지 못했다. 때문에 러시아는 여하한의 도덕성도 결여한 무의미한 존재이며, 단지 세계가 보고 닮지 말아야 할 타산지석을 제공한다는 데서 유일한 도덕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따름이다. 지금 러시아의 귀족은 병들었고 민중은 우매하니…… “우리는 망치로 머리를 내려쳐서라도 각성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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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 니콜라이 1세
_ '12월당'에게 호된 교훈을 치르며 즉위한 그는 러시아를 강력한 '전제주의' 아래 통치합니다.

그럼 출로는 어디에 있는가? 유럽의 민족들은 무릇 서로 교통하고 투쟁함으로써 역사의 도정에 나서 왔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먼 북방의 땅에 고립되어 살았고, 무엇보다도 유럽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전통을 선택함으로써 고립을 미화해 왔다. 러시아의 비극이자 죄악의 씨앗이 여기에 있다. 러시아와 유럽의 차이는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닌, 다만 수치스런 이탈의 징표일 뿐이요 하루바삐 치유해야 할 상처다. 만약 러시아에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고립과 특수로부터가 아닌, 유럽적 보편성을 받아들일 때 가능할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서한」이 복사물로 회람될 때와 인쇄되어 유통될 때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지식 사회의 찬반양론을 넘어, 차르 정부가 국기(國基) 수호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단지「제1서한」만이 유포되었을 뿐인데도, 차르의 검열 기구와 경찰 기구가 발칵 뒤집어졌고, 『망원경』의 편집장과 검열관 등이 줄줄이 소환되어 문초를 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죄 판결을 받기에 앞서「서한」의 저자를 고발했으며, 『망원경』은 영구 폐간되었다. 차아다예프는 금치산자로 판정되어 가택연금하에서 정신병 치료를 강요당했다.

일견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로 가득할 뿐인 서한 ‘나부랭이’가 엄청난 평지풍파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서한」이 대단한 역사철학적 식견이나 진리를 담아서가 아니었다. 유럽사가 곧 보편사란 주장은 19세기 유럽인들의 전형적인 관념이자 근대성의 이데올로기적 상상력에 불과하지 않은가? 또한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래 러시아는 꾸준히 유럽의 역사적 수순을 뒤따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다면「서한」의 타깃이 러시아 민족성과 종교였기 때문인가? 이 대답은 절반만 옳다. 진짜 문제는 정교가 러시아 정부 시책의 이데올로기적 지지대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차아다예프가 건드린 것은 종교와 결합한 국가주의의 이념 자체였던 것. 그건 이미 사교계의 스캔들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반역을 뜻했다.

12월당에게 호된 교훈을 치르며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국가를 물리적이고 이념적으로 철통같이 보위할 수 있는 강력한 구심점을 요구했다. 1833년 교육부 장관에 취임한 세르게이 우바로프(Sergei Uvarov)가 내세운 ‘정교·전제정·민중성’의 삼위일체는 바로 그 요구에 부응하는 러시아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토대였다. 유럽에는 없는, 오직 러시아에만 있는 국가적 고유성으로 제시된 정교(종교)와 전제주의(정치), 민중성(문화)에는 전체주의가 요구하는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삼위일체를 통해 러시아는 유럽과는 다른 길을 가며, 유럽과는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될 것이다. 유럽과의 차이를 정당화하고, 심지어 유럽의 대안이 되게끔 해주는 이 결합체에 차아다예프는 침을 뱉고 조소를 퍼부었던 게 아닌가? 제발 꿈에서 깨라고, 러시아는 세계사의 독야청청한 섬이 아니라 후미에 버려지고 난파된 피난선에 불과하다고, 귀족들의 지식놀음은 정신적 수음 행위에 불과하며 주변을 돌아보면 술에 취한 채 학대당하고 있는 민중들이 있노라고…….

차아다예프의 서한이 어떤 진리를 담고 있든, 이제 그 수신자는 러시아인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전체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차아다예프의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응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울부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전까지 편안하고 안락하게 철학을 향유하던 러시아 지식인들은 이제부터 철학을 가지고 “세계를 변형하는” 문제에 직접 맞닥뜨리게 된다. 단지 교양인, 식자층에 머물던 이들이 윤리적 소명감으로 무장한 ‘인텔리겐치아’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역사와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 책임감과 죄의식 등이 그들의 내면을 파고들었으며, 한번 접어든 이 길을 뒤로 물리기란 전혀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알렉산드르 게르첸을 인용하면, 그는 차아다예프의「서한」을 회고하며 이렇게 감개무량해 했다.

“그것은 캄캄한 밤중에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이었다. 난파되었음을 알리며 침몰하는 소리든, 도움을 외치는 신호든, 서광을 알리는 소식이든 또는 그런 것은 없다는 소식이든,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사람들은 잠을 깨야 했다는 사실이다.”

<보론>
구소련에서는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의 시조로 18세기의 계몽사상가 알렉산드르 라디셰프(Aleksandr Radishchev, 1749~1802)를 꼽아왔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국가의 명으로 유럽 유학을 다녀왔으나, 볼테르와 루소의 사상에 심취하여 인민 평등과 농노제 폐지 등을 주장하는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1790년 출간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은 러시아 농노들의 참담한 현실과 부정부패, 억압과 전제주의를 고발하는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서, 여기서 라디셰프는 법과 정의의 이념에 걸맞은 정치가 러시아에 없음을 비난하고 있다. 계몽주의 역시 근대성의 한 범주라는 점에서 그를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기원으로 삼아도 문제될 게 없겠다. 다만, 이 급진적인 계몽주의자에게는 19세기적 의미에서의 역사철학이 결여되어 있던 바, 그는 러시아와 유럽의 운명을 비교하고 그로부터 미래를 가늠해 보는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라디셰프를 시대의 고독한 반역아로 남겨 두고,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격렬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가 될 것이다. 역사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의지를 인텔리겐치아의 정의에 포함시킨다면, 그 시조는 차아다예프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09/08/13 20:42 2009/08/13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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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혜원 2011/03/23 23:31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 그린비 2011/03/23 23:38

      반갑습니다!
      혜원님의 댓글에 막 기운이 솟아나네요.(응?)
      자주 뵈어요~ ^^*

  2. 최예은 2011/03/29 21:35

    글 잘 읽고갑니다~^^

    • 그린비 2011/03/30 10:29

      안녕하세요 최예은님!
      자주 들러주세요~ ^^

  3. 이지은 2011/03/30 21:39

    글 잘 읽었습니다. 차아다예프 뿐만 아니라 인텔리겐치아와 당시 러시아의 전반적인 사상의 흐름까지 이해하게 해준 글이네요.

    • 그린비 2011/03/31 11:17

      안녕하세요 이지은님.
      인문학 해외 통신, 러시아 편을 쭉~ 읽어보시는 것도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블로그에서 자주 뵈어요~ ^^*

  4. ESTHER 2012/04/02 00:22

    ㅋㅋ 역시 최진석선생님의 글이란.. 쵝오..

    • 그린비 2012/04/02 09:22

      ESTHER님 안녕하세요.
      슬라비카 총서를 통해서도 최진석 선생님의 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하하! ^^;;
      응원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