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을 물리치는 공부의 힘

공허한 반성과 자학하는 자아

원인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분노,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권력에 대한 짜증, 삶의 순간순간 마다 나를 덮쳐오는 무지, 그리고 답답함. 우리는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아주 쉽게 ‘자신’의 문제로 돌립니다. 그리고 ‘반성’하죠. 내가 속이 좁아서 화를 낸다고 생각하고, 내가 엉뚱한 놈에게 투표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내가 공부를 안 해서 무식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에게 답답함을 느끼곤, 곧바로 공허한 ‘반성’을 시작 합니다. 그리고 그 반성은 ‘공부해야지’라는 다짐으로 귀결되곤 하죠. 이런 느낌으로 시작한 공부란 대개 그렇듯이, 몇 차례의 ‘고행’을 참는 것으로 마감되게 마련입니다. ‘공허한 반성’의 귀결점은 ‘자학’自學아닌 ‘자학’自虐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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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OTL
_ 바로 이런 느낌이죠. 고개는 바닥을 보고, 손은 땅을 짚고, 뇌에선 자기파괴적 정념을 담은 신경물질들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서든 반성과 자학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반성은 우리를 위축되게 만들고, 자학은 우리의 활동성을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 뿐이죠. 이런 상태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고, 이런 상태에 빠졌더라도 얼른 빠져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딜레마가 생깁니다. 반성의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를 반성하게끔 만든 사태들을 하나씩 복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태를 명백하게 이해할수록, 그로부터 벗어나는 힘도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조건들’ 속에서 ‘나’를 보는 법

하지만, 그 이해의 과정이 아주 거친 반성(‘다음부터 그러지 말아야지’)과 후회(‘내가 왜 그랬을까’)의 과정일 뿐이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지만, 그래서 자신이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행동을 선택했다고 믿지만, 그 자유란, 우리가 떠밀려 얻게 된 자유, 규정된 행동 이외에는 다른 어떤 행동도 상상할 수 없는 제약된 자유, 그래서 결국에는 이름만 남은 ‘자유’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복기하되, 후회하지 않는 기술,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게끔 만든 그 ‘조건’을 보는 기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반성을 넘어서는 ‘이행’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구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하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 속의 악마처럼, 살아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권,「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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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저 유명한 말이 겨냥하고 있는 지점도 앞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들 자신의 삶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선택한 상황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평 위에 내던져진 상태에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명백하게 복기하기 위해서, 이미 특정한 시점을 통과해버린 나쁜 사건으로부터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탈출하기 위해서, 삶을 이루고 있는 조건들 하나하나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울한 자는 탈출할 수 없다

“그 어떤 것이 명랑함보다 더 필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일도 들뜸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잘되지 못하는 법이다. 지나칠 정도로 넘치는 힘이야말로 힘에 대한 증거다”
(니체전집15권, 『우상의 황혼』, 73쪽)

슬픔의 정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정서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어려운 국면에서 슬퍼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반대로 그 국면에서 기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공부가 어려운 이유는 어려운 국면에서 기쁘게 도망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맑스와 니체의 위대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잃어버리지 않는 ‘명랑함’, ‘자유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모든 가치들로부터 기쁘게 이탈하려는 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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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作 <절규>
_ 뭉크가 ‘절규하는 사람’을 화폭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느낌으로 처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감정의 동요로부터 탈출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저는 쉽게 영향 받고, 쉽게 좌절하고, 쉽게 분노하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어려운 국면에 빠지기 쉬운 자인 것이죠. 그냥 그렇게 살다가 아주 조금 깨달았습니다. 우울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하고 말입니다. 오래된 습관이 몸에 남아 요즘도 그런 정념에 간혹 휩싸이곤 합니다만, 그래도 전보다는 일상의 각 국면들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들 각자가 가진 ‘탈출의 역량’이 더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역량’이 바로 ‘자유’일테니 말입니다.

- 웹기획팀 정군
2009/09/14 10:30 2009/09/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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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레레 2009/09/14 12:16

    추천 꾹 눌러드리고 갑니다. ㅎㅎ

    • 그린비 2009/09/14 13:08

      감사합니다. ^^*
      공부 잘 하고 계시죠? ㅎㅎ
      gBlog 2호 소식은 들으셨나요? 곧 보내드릴게요~

  2. 조르바 2009/09/14 16:31

    오랜만에 보는 퍼스트 건담이군요-_-

    우울을 달고 다니는 저에게도 힘이 되는 글입니다~

    • 그린비 2009/09/14 17:09

      조르바님, 반갑습니다. 퍼스트 건담을 알아보시는 눈! +ㅅ+;;
      우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셔서 꼭 자유로워지시길 바랍니다.

  3. 2009/09/25 23:07

    아.. 제가 요즘 느끼는 거랑 비슷하네요. 탈출. 상처로부터 회복되는 속도가 살면서 조금씩 빨라진다는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맑스와 니체의 책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그린비 2009/09/28 09:34

      맑스와 니체 꼭 읽어 보세요. 특히, 니체가 상처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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