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난 후에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공부'라는 단어와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정설이나, 표준, 모범과 같이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기능이나 강력한 진리값을 갖는 그런 지식들을 '익힌다'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죠. 이 이미지는 정말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상황에 던져지면 (가령 직장을 옮겼다거나,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한다거나 하는) 그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어떤 '표준모델'을 찾아 공부하기 시작하죠. 공부에 대한 이런 습관은 '먼저 ~을 알고 난 후에 할 수 있다'는 형식을 작동시킵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어떤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혁명적 변화'와는 거리가 먼 사건이 일어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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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네발트 作 <그리스도의 부활>
_ '비판적 시선'이란 저 위에서 오류를 판별하는 권력자의 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선을 갖는 것 자체가 불쾌하지 않나요?

철학과에서는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냉정하게 대하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논리적인 결점이 있는지, 어디에서 비약이 발생하는지를 찾으라고 말하죠. 그런 조건에서 '토론'이란 바로 그런 '단점들'을 찾아내는 작업이 됩니다. 앞서 말한 '~를 알고 난 후에'라는 형식은 여기서도 작동합니다. 칸트의 본뜻을 '알고 난 후에', 헤겔의 의도를 '알고 난 후에' 비판할 점들을 찾아내고, 그런 것들을 준거로 삼아 다른 사람의 발표문에 비판을 가하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과정들이 주제로 다뤄진 어떤 철학자의 사유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비판적 독해'와 '냉정한 책읽기'의 결과가 본 텍스트의 강화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런 독해가 어떠한 '생성'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고 난 후에 비판하라'는 형식이 '생성'을 가로막습니다. 그렇게 미리 알아가는 과정은 특정한 '룰'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고, 이 과정에서 모든 비판을 하나의 룰 안에서 일어나는 비판이 되는 것이죠.

"누군가 내게 반론을 제기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래요, 그래, 자, 다른 것으로 넘어갑시다"라고요. 반론으로는 이제껏 아무 소득도 없었답니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오직 질문을 지겹게 되풀이함으써만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철학은 죽었습니까? 우리가 철학을 넘어서게 될까요?' 정말 골치 아픈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질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움직임은 항상 사유하는 이의 등 뒤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납니다."
(질 들뢰즈, 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8쪽)

그런 공부의 이미지, 학과의 분위기 속에서 들뢰즈는 놀라운 탈출구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해결'도 불가능한 설익은 문제들에 대해, '벗어나라!'라고 말하는 철학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서양철학사의 중요한 문제들은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다 나왔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그 질문은 2천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던집니다. 저는 그들 모두가 '벗어나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비판하는 와중에도 결코 '비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것(사유)을 만들어내죠. 이것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새롭게 생각하는 형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사유와 연장)을 비판하면서, 일원론적으로, 내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개발합니다. 니체는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글쓰기 방식(아포리즘)을 창안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유의 역사는 늘 새것을 만드는 역사, 생성의 역사를 그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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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作 <거인>
_ 땅에 붙어서, 한계를 돌파해가는 이미지. '거인'은 그렇게 생성의 장을 넘나드는 자가 가진 '삶의 역량'을 보여줍니다.

"글을 쓰면서 작가는 항상 글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글을 줍니다. 하지만 바로 이들 ―글을 갖지 못한 이들이 글쓰기에 생성을 부여하지요. 이 생성이 없다면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이미 확립된 기성 권력에 봉사하는 단순한 중언부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책, 87쪽)

(독자로서의) 우리는 어떤 '생성'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도 들뢰즈를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배반'이 곧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배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정체성'을 잃어가는 '미지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언뜻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이 우리에게 무한한 잠재성을 열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책을 읽을 때, 어떤 변화도 없이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머물러 있다면, 그 책에 대해 그보다 큰 모욕은 없을 것입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강렬하게'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늘하게 자신을 엄습하는 낯선 사유를 만날 때 우리는 그것과 '반응'한 것이고, 이 반응은 우리의 조성組成을 바꾸어 놓는 것이죠. 텍스트를 읽는 '심판자'가 되거나, '노예'가 되는 순간 변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혁명'이 자신에 '대해' 있는 '심판자'를 없애는 것이라면, '노예'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결별하는 것이라면 사유의 혁명은 바로 그러한 태도와 결별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다면, 어떤 사유를 만나더라도 우리는 매번 온몸을 뒤흔드는 혁명(벗어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알고 난 후에' 사귈 수 있는 친구란 없는 법입니다. '친구'는 마주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관계고, 그런 점에서 세계에는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무수한 책들이 있습니다. 가볍게 벗어나는 가운데, 무수한 친구들과 사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웹기획팀 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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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8 10:36 2009/09/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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